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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②] '충무로 미다스' 장원석 대표 "대박 영화, 제1의 조건은 시나리오"
작성일 | 18-07-09
[인터뷰②] '충무로 미다스' 장원석 대표 "대박 영화, 제1의 조건은 시나리오"
작성일 | 18-07-09
[SBS funE | 김지혜 기자]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항해에 비교하자면 감독은 선장이고 프로듀서는 나침반이다. 감독은 키를 움직이고, 프로듀서는 방향을 제시한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프로듀서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가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행여 잘못된 길로 빠지진 않는지 시시각각 점검한다. 영화에 가장 깊게 관여한 사람이면서도 끝까지 제3자의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존재다. 좋은 영화엔 좋은 감독과 배우가 있다. 그리고 반드시 좋은 프로듀서가 있다.
장원석. 27살에 영화 '왕의 남자' 제작실장으로 활약하며 충무로에 이름 석 자를 알렸다.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인물은 아니다. 이십 대 중반부터 시쳇말로 영화판을 뒹굴었다.
10대 시절 일찌감치 '영화감독'으로 꿈을 정한 그는 중앙대 영화학과 입학이라는 목표만 놓고 내달렸고, 실수 없이 첫 단추를 끼웠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장밋빛이 아니었다. 학문의 요람 대신 치열한 영화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졸업장을 따지 않은 건 "학교생활이 무료해서 기도 하지만, 영화일에 지칠 때 다른 대안을 찾게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장원석은 2010년대 이후만 놓고 봤을 때 충무로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기획했고 제작한 영화인 중 한 명이다. '의형제'(2010), ‘최종병기 활’(2011), ‘퍼펙트게임’(2011), ‘점쟁이들’(2012),‘내가 살인범이다’(2012), ‘집으로 가는 길’(2013), ‘끝까지 간다’(2014) 등을 제작했고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 공동기획했으며 '비스티 보이즈’(2008), ‘허삼관’(2014)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Q. 첫 영화가 '박봉곤 가출 사건'(1996)이다.
A. 대학에 적응을 못 하고 있었는데 선배인 안동규 대표(현 두타연 대표)님이 '박봉곤 가출사건' 제작부 일을 시켜주셨다. 당시 제작부엔 안 대표님과 나를 포함해 달랑 4명이었는데 핸드폰도 없이 발로 뛰면서 일했다. 영화를 마친 후 너무 힘들어서 '나 다시는 제작부 안 해!'하고 군대에 갔다.
Q. 그래서 제대 후엔 연출부를 했다고?
A. 군대를 다녀오니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 감독에 대한 꿈이 있었으니 연출부로 들어갔다. 김용화 감독이 준비하던 '오르페우스'의 연출부, 장항준 감독의 영화 연출부 일을 했다. 근데 다 엎어졌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리고 힘들어서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다.
Q. 충무로 시절에 연출부, 제작부를 거쳤으면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텐데?
A. 대구에서 올라와 친구의 옥탑방에 신세질 정도로 어려웠다. 내가 영화 하면서 처음으로 월급 받은 작품이 '빙우'(2003)다. 그전까진 한 푼도 못받았다. '빙우'때 월급 100만 원, '왕의 남자'때 150만 원을 받았다.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게 생활의 발견이구나' 싶더라. 영화도 보고 술도 한잔 하고 문화생활이란 걸 하기 시작한 거지.
Q. 영화감독을 꿈꾸다 제작자로 방향을 튼 결정적 계기는?
A. '오버 더 레인보우'(2002)연출부 일을 끝내고 감독 준비를 했는데 잘 안됐다. 그때 진로를 확실히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다들 "넌 프로듀서 스타일"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제작부장으로 들어간 작품이 '빙우'다. 그 다음 작품이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2005)였다.
Q. 프로듀서 스타일이란 건 뭔가? 감독 스타일과는 어떻게 다른 건가?
A.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사교성이 좋고…. 감독은 하나만 파고드는 오타쿠 기질이 있어야 하는데 난 그렇진 않다. 또 연출 준비할 때 영화가 자꾸 엎어지다 보니 '난 감독할 인연은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참고로 대학 때 전공(영화연출)은 다 A학점 받았다. 하하.
Q. 31살에 '다세포 클럽'의 대표가 됐다. (장원석 대표는 현재 두 영화 제작사 '다세포 클럽'과 '비에이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프리랜서로 프로듀서 활동을 하고 있다)
A. 어느 날 안동규 대표님이 "너 '다세포클럽' 대표 해라"라고 하시더라. '박봉곤 가출사건'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게 해주셨으니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초반에 영화가 계속 엎어졌다. 그때 윤종빈 감독의 '비스티 보이즈', '평행이론', '의형제' 등의 프로듀서를 프리랜서로 했었다.
Q. 윤종빈 감독은 대학 후배기도 한데…. 이때 처음 만난 건가?
A. 중대 후배다 보니 친분은 있었다. 윤종빈 감독이 상업 영화 데뷔를 앞두고 경험 차원에서 '왕의 남자' 연출부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2005)가 칸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영화제를 휩쓸었다. 당시 부산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이 각 제작사에 전화를 걸어 "윤종빈은 꼭 잡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사 제안이 봇물 터지는 상황이었다.
Q. 그런 윤종빈을 잡은 원동력은...학연?
A. 아니다. 오히려 난 "네가 나중에 힘들어지면 같이 하자. 그때 도와줄게"라고 했다. 사심없는 내 모습에 감동했던 것 같다. '비스티 보이즈'(2008)를 같이 하자고 하더라.
Q. 생각해보면 '비스티 보이즈'는 잘 만든 실패작이었다. 당시로써는 쉽지 않은 소재라 그런지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들었다.
A. 정말 힘들었다. 우선 펀딩이 되질 않았다. 영진위 지원금 4억으로 시작한 영환데 센 소재와 배우의 인지도 때문에 투자가 원활치 않았다. 그땐 하정우가 지금의 하정우가 아니었다. '추격자'를 하기 전이었으니. 진짜 발로 뛰다시피 했다. 그러다 'DCG플러스'가 나서면서 메이드 된 거다. '비스티 보이즈'는 16억 원으로 제작해 73만 명 들었다. 겨우 손익분기점은 맞췄다. 그때부터 한해도 안 쉬고 영화 제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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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09
[SBS funE | 김지혜 기자]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항해에 비교하자면 감독은 선장이고 프로듀서는 나침반이다. 감독은 키를 움직이고, 프로듀서는 방향을 제시한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프로듀서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가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행여 잘못된 길로 빠지진 않는지 시시각각 점검한다. 영화에 가장 깊게 관여한 사람이면서도 끝까지 제3자의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존재다. 좋은 영화엔 좋은 감독과 배우가 있다. 그리고 반드시 좋은 프로듀서가 있다.
장원석. 27살에 영화 '왕의 남자' 제작실장으로 활약하며 충무로에 이름 석 자를 알렸다.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인물은 아니다. 이십 대 중반부터 시쳇말로 영화판을 뒹굴었다.
10대 시절 일찌감치 '영화감독'으로 꿈을 정한 그는 중앙대 영화학과 입학이라는 목표만 놓고 내달렸고, 실수 없이 첫 단추를 끼웠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장밋빛이 아니었다. 학문의 요람 대신 치열한 영화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졸업장을 따지 않은 건 "학교생활이 무료해서 기도 하지만, 영화일에 지칠 때 다른 대안을 찾게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장원석은 2010년대 이후만 놓고 봤을 때 충무로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기획했고 제작한 영화인 중 한 명이다. '의형제'(2010), ‘최종병기 활’(2011), ‘퍼펙트게임’(2011), ‘점쟁이들’(2012),‘내가 살인범이다’(2012), ‘집으로 가는 길’(2013), ‘끝까지 간다’(2014) 등을 제작했고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 공동기획했으며 '비스티 보이즈’(2008), ‘허삼관’(2014)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Q. 첫 영화가 '박봉곤 가출 사건'(1996)이다.
A. 대학에 적응을 못 하고 있었는데 선배인 안동규 대표(현 두타연 대표)님이 '박봉곤 가출사건' 제작부 일을 시켜주셨다. 당시 제작부엔 안 대표님과 나를 포함해 달랑 4명이었는데 핸드폰도 없이 발로 뛰면서 일했다. 영화를 마친 후 너무 힘들어서 '나 다시는 제작부 안 해!'하고 군대에 갔다.
Q. 그래서 제대 후엔 연출부를 했다고?
A. 군대를 다녀오니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 감독에 대한 꿈이 있었으니 연출부로 들어갔다. 김용화 감독이 준비하던 '오르페우스'의 연출부, 장항준 감독의 영화 연출부 일을 했다. 근데 다 엎어졌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리고 힘들어서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다.
Q. 충무로 시절에 연출부, 제작부를 거쳤으면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텐데?
A. 대구에서 올라와 친구의 옥탑방에 신세질 정도로 어려웠다. 내가 영화 하면서 처음으로 월급 받은 작품이 '빙우'(2003)다. 그전까진 한 푼도 못받았다. '빙우'때 월급 100만 원, '왕의 남자'때 150만 원을 받았다.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게 생활의 발견이구나' 싶더라. 영화도 보고 술도 한잔 하고 문화생활이란 걸 하기 시작한 거지.
Q. 영화감독을 꿈꾸다 제작자로 방향을 튼 결정적 계기는?
A. '오버 더 레인보우'(2002)연출부 일을 끝내고 감독 준비를 했는데 잘 안됐다. 그때 진로를 확실히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다들 "넌 프로듀서 스타일"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제작부장으로 들어간 작품이 '빙우'다. 그 다음 작품이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2005)였다.
Q. 프로듀서 스타일이란 건 뭔가? 감독 스타일과는 어떻게 다른 건가?
A.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사교성이 좋고…. 감독은 하나만 파고드는 오타쿠 기질이 있어야 하는데 난 그렇진 않다. 또 연출 준비할 때 영화가 자꾸 엎어지다 보니 '난 감독할 인연은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참고로 대학 때 전공(영화연출)은 다 A학점 받았다. 하하.
Q. 31살에 '다세포 클럽'의 대표가 됐다. (장원석 대표는 현재 두 영화 제작사 '다세포 클럽'과 '비에이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프리랜서로 프로듀서 활동을 하고 있다)
A. 어느 날 안동규 대표님이 "너 '다세포클럽' 대표 해라"라고 하시더라. '박봉곤 가출사건'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게 해주셨으니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초반에 영화가 계속 엎어졌다. 그때 윤종빈 감독의 '비스티 보이즈', '평행이론', '의형제' 등의 프로듀서를 프리랜서로 했었다.
Q. 윤종빈 감독은 대학 후배기도 한데…. 이때 처음 만난 건가?
A. 중대 후배다 보니 친분은 있었다. 윤종빈 감독이 상업 영화 데뷔를 앞두고 경험 차원에서 '왕의 남자' 연출부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2005)가 칸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영화제를 휩쓸었다. 당시 부산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이 각 제작사에 전화를 걸어 "윤종빈은 꼭 잡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사 제안이 봇물 터지는 상황이었다.
Q. 그런 윤종빈을 잡은 원동력은...학연?
A. 아니다. 오히려 난 "네가 나중에 힘들어지면 같이 하자. 그때 도와줄게"라고 했다. 사심없는 내 모습에 감동했던 것 같다. '비스티 보이즈'(2008)를 같이 하자고 하더라.
Q. 생각해보면 '비스티 보이즈'는 잘 만든 실패작이었다. 당시로써는 쉽지 않은 소재라 그런지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들었다.
A. 정말 힘들었다. 우선 펀딩이 되질 않았다. 영진위 지원금 4억으로 시작한 영환데 센 소재와 배우의 인지도 때문에 투자가 원활치 않았다. 그땐 하정우가 지금의 하정우가 아니었다. '추격자'를 하기 전이었으니. 진짜 발로 뛰다시피 했다. 그러다 'DCG플러스'가 나서면서 메이드 된 거다. '비스티 보이즈'는 16억 원으로 제작해 73만 명 들었다. 겨우 손익분기점은 맞췄다. 그때부터 한해도 안 쉬고 영화 제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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